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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때문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미국

캐나다 사회

by 조이밴 2025. 9. 1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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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부터 1799년 사이 프랑스는 왕정을 타파하고 자유, 평등, 우애(동지애)라는 슬로건 아래 공화국으로 변신하지. 

당시 캐나다는 1763년 영국이 프랑스령 퀘벡을 점령하고, 퀘벡은 로워 캐나다란 명칭으로 불리던 때였어.

 

혁명이 일어난 후에 캐나다에는 보수적인 프랑스 카톨릭 사제들이 1,000명 정도 이민을 와. 이들은 프랑스 공화국에 충성 맹세를 거부한 이들이지. 혁명의 혼란기 중에 프랑스는 반성직자 정책을 펼쳤고, 일부 성직자는 폭력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캐나다까지 온 이들은 반혁명적인 사람들이었어. 또한 영국은 식민지내 반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수적인 사제들만 받은 것도 있지. 

 

1799년부터 1815년까지 캐나다 주둔 영국군 제41연대 군복. 자료원= 캐나다 국가 기록원.

 

단절된 퀘벡... 식민지 지배 강화

 

이렇게 이민온 프랑스 성직자들은 혁명을 테러라고 가르치면서 프랑스의 앙시엥리짐(혁명 정부)에 매우 적대적이었어. 게다가 신이 정한 왕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영국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왕당파 논리가 퍼졌어. 성직자들은 완전히 영국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준거야. 프랑스 혁명 이후 이어진 정치는 아름답지 않았지. 1793년부터 94년 사이 이어진 프랑스의 공포정치(Reign of Terror)는, 반프랑스 성직자들의 논리와 이에 대한 프랑스계 대중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어.  

 

이어진 나폴레옹 정부와 이후 황실에 대해서도 퀘벡민은, 개인들은 모르지만, 최소한 공적으로는 매우 적대적이었어. 이 결과 퀘벡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나폴레옹의 패배를 오히려 축하하고 기념했지. 그러나 사람을 계속 속일 순 없는거야. 결국 한 세대가 지나 로어 1837년부터 로어캐나다에서 파트리오트 반란이 일어나 식민지 지배 당국에 민주화를 요구하게 돼. 다만 이 반란은 실패하지.

 

이후 영국은 사람들이 프랑스물들을까봐, 혹은 자유, 평등, 우애 목소리가 캐나다에서 나올까봐 이민을 억제했지. 특히 프랑스계 뿐만 아니라 당시 대륙에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불어쓰는 나라 출신 이민은 제한했어. 대신 프랑스계 인구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계는 허용했지.

 

결과적으로 이게 전세계 역사에서 흔한 영국의 삽질이었던게, 세금 싫어 반란을 일으켜 새롭게 세운 미국은 프랑스인을 포함한 유럽인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열렬히 받아서 완전히 비교가 된거야. 애초에 식민지 시절부터 인구가 더 많은 미국과 적은 캐나다의 차이가, 미국은 적극 이민 환영, 캐나다는 출신 제한으로 더욱 크게 벌어져 버렸지.   

 

1799년 케이프 브레튼. 그림= 캐나다 국가 기록원

 

중립 선언한 미국... 자국 발전 기틀 마련

 

프랑스 혁명은 미국의 정치에 오히려 캐나다보다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돼.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이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을 창설하지. 반면에 처음에는 혁명을 환영했다가 정적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공포정치를 본 알렉산더 해밀턴과 존 아담스는 연방주의당(Federalist Party)을 만들고, 과격한 정치에 대해 반대하지. 이들은 한 발자국 더 나가서 프랑스의 극단적인 정치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어. 즉, 현대의 미국 양당 체재 원형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시작된거야.

 

그럼 미국내 양당이 엄청나게 싸워서 문제가 일어났는가 하면, 여기서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딱 조율에 들어가. 소속당이 없는 워싱턴은 1793년에 중립 선언(Neutrality Proclamation)을 해버리지. 프랑스와 영국 싸움에 미국이 끼는 건 아니되오라는 선언으로 미국은 내정에 집중하지. 아니 하려했지. 

 

프랑스의 혁명 난봉꾼의 삽질

그런데 국부 말이라고 미국인이 무조건 따랐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 민주공화당은 엄청나게 반발했어. 급기야는 같은해 에드몽-샤를 쥬네라는 프랑스 외교관이 미국에 와서 민주공화당과 엮어서 사병을 조직해 미국 항구에서 영국 배를 습격하는 일을 벌려. 미국인의 혁명 찬성 여론을 외국인이 이용한 셈이야. 영국배라지만, 정체는 미국을 다녀가는 캐나다 소속 배 였다지.  쥬네는 한술 더 떠서 중립적인 워싱턴을 몰아내고 아예 민주 공화당 정권 창출을 노리기 까지 하지. 

 

에드몽-샤를 쥬네

 

사실 프랑스는 1778년 프랑스-미국 동맹(Franco-American alliance)을 통해 미국의 독립 전쟁을 지원해줬고, 미국인 사이에서는 그런 프랑스를 도와줘야 한다는 여론도 강했지. 그래서 쥬네의 선동이 먹힌 거야. 아~물론 미국을 지원한 건 루이 15세 였고, 너무 지원을 잘해주느라 프랑스의 경제가 무너진 게 혁명의 주요 배경이 됐지만, 미국인은 그런 프랑스 왕실의 운명에는 크게 상관안했지. 지나간 권력에 대해서는 바보가 아닌한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

 

아무튼 쥬네의 난장은 처음에는 미국-프랑스 해군끼리 대립하는 사태까지 이끌어냈지만, 오래가지 못해. 그가 속한 자코뱅당이 실각하면서, 대사직을 박탈 당하고 프랑스에서 체포 명령이 떨어지지. 결국 쥬네는 제퍼슨에게 살려달라고 요청해 미국에 망명하게 돼. 프랑스 입장에서 쥬네는 자코뱅당 척결 대상인데, 미국이 쥬네 망명을 받아주면서 두 나라 관계는 파탄나고, 워싱턴의 중립 정책은 첫 승을 거두게 돼. 

 

그리고 흐른 역사

캐나다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어쩔 수 없이 유럽인, 엄밀히 말하면 아일랜드계의 이민을 허용하게 돼. 아일랜드 대기근 때문이었지. 다만 이 때도 영국의 억압을 받았던 아일랜드계는 캐나다보다는 대거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두 나라의 인구, 또한 인구를 기반으로 한 국력 차이는 더욱 벌어지게 되지. 다만 당시 캐나다인은 캐나다를 독립국으로 인식한게 아니라 최강인 대영제국의 일부로 생각했으니, 이런 국력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어. 결국 훗날 미국이 고 웨스트로 덩치를 완전히 키워 강해지면서 미국에 합병당할까봐 걱정하는 신세가 돼.  

 

미국은 국토가 더블이 되는 매우 흥미로운 역사의 연속이 일어나는데. 요약하면 중립을 지켜 축적한 국력을 민주공화당이 잘 활용해서 미국 국토를 불려나가는데 성공해. 다만 항상 성공한 건 아니고 1812년 영국(사실상 캐나다)에 전쟁을 선포했다가 대차게 깨지긴 하지만, 이후 위기를 연방주의자당이 주창했던 중립을 쓱싹 가져다 쓰며 극복하지. 그 과정에서 색깔을 잃은 또는 빼앗긴 연방주의자당은 대선에서 패배해 결국 1825년에 연방 무대에서는 사라지지. 

 

참고로 민주공화당은 말그대로 지금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성격을 둘 다 가지고 있었어. 공화당의 작은 정부, 민주당의 지역 분권이 섞인 형태였지. 현대의 좌파우파나 진보보수 기준으로 보기에는 애매한 빅텐트 정당인데, 난 이게 오히려 국가 발전에는 크게 도움이 됐다고 봐. 당대 작은 미국을 큰 미국으로 키우는 목표에, 좋아보이는 정책은 좌우 가리지 않고, 혹은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다 써먹었으니 말이지. 실용주의인거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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