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한국에서 내각제 얘기하면 조리돌림 당할 수 있다는 거. 하지만 난 캐나다 사회 기준으로 중도파이고, 한국 정치와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란 선을 그어둘께.
솔직히 인터넷에 한국발 내각제 혐오(?) 여론이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어. 내각제란 건 영국에서 시작된 정치 시스템이고, 많은 나라들이 내각제로 잘 돌아가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으니 말이야. 특히 내가 사는 캐나다에서는 내각제 꽤 괜찮거든.
대충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의 내각제 혐오 여론 배경 중에는 "의회의 다수당이 입법 폭주를 해버리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있더라고. 이 외에도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면 좋겠어.
한편 같은 영국식 내각제인데 왜 일본은 정권교체가 그토록 어려운가하는 문제를 일본인 친구와 얘기나눌 기회가 있었어. 그 중에 하나가 일본은 다이묘가 의원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란 지적에 많이 공감했어. 그런 바로 옆나라 일본의 내각제 인상이, 기득권이 마르고 닳도록 마음대로 하게 돼 있어서, 한국 사람들의 내각제 혐오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나는 그런 일본과는 좀 분위기가 다른, 좀 먼나라 캐나다 내각제 얘기를, 입법 폭주가 가능한가를 중심으로 좀 해볼께.
입법폭주 문제 말인데. 내각제의 특성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워. 일단 연방제 국가인 캐나다에서는 헌법을 대상으로 한 입법폭주는 사실상 불가능해. 오타와에 있는 연방 의회 뿐만 아니라, 캐나다 국내 10개주 중에서 10개 주의회가 각각 과반 이상으로 동의해야 개헌이 가능하기 때문이지. (사안에 따라 7개 주의회가 동의해도 되는 것도 있긴하나, 궁금하면 찾아보도록.)
만약 영국 왕실을 캐나다에서 삭제하자거나, 미연방에 가입하자고 한다면, 모두 개헌을 해야 해. 그럼 캐나다 국내 10개 주의회에서 각각 과반 이상의 동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게 가능해 보이지 않네. 캐나다가 왕실 삭제나 미 연방 가입을 쉽게할 거처럼 설명하는 유튜버 있으면 믿지마. 절차상 거의 불가능하니까.
왜 불가능하냐면 각 주의회를 보면 다수당들의 성격이 매우 달라. 예컨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현재 집권당은 신민주당(NDP)으로 좌파인데, 바로 옆에 앨버타주의 현재 집권당은 연합보수당(UPC)으로 중도 우파부터 극우까지 빅텐트 우파야. 이렇게 주마다 성격들이 다른데 이들이 동일 사안에 과반 이상 찬성하기는 참 쉽지 않지.
그럼 개헌 말고, 일반 법령은 어떨까? 캐나다나 한국이나 공통적으로 입법에 신중을 기하는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삼독회제(three reading system)야. 법안을 의회 내에서 입법 전에 세 번 검토하는 건데, 어느 법이고 삼독회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하루 안에 입법은 사실상 불가능해. 여기에 캐나다에는 하원에서 통과시킨다한들, 상원에서 붙잡을 수도 있지. 참고로 캐나다의 상원은 하원과 마찬가지로 의회지만 성격을 들여다보면 매우 다른데, 상하원의 차이점은 나중에 얘기 하자.
이 삼독회제를 필드로 활용해 특정법 통과를 막는 전략으로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있지. 법안이 회기 내 통과되지 못하게 제1 독회부터 장시간 연설 등을 통해 지연시키는 거야. 캐나다 역사에도 필리버스터는 꽤 흔하게 등장해. 다만 필리버스터가 핵무기급은 못되는 게, 다수당이 시간 배당제(time allocation)나 토론 종료(closure)를 때려서 필리버스터를 중단 시킬 수도 있긴하지.
다만 필리버스터-시간 배당제 같은 조치가 나올 정도의 거물급 법안이 등장한다면, 언론은 당연히 상당한 이슈로 만들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시끄러워져. 이 과정에서 입법에 불리한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면, 여당도 삼독회제를 거치는 동안 어느 정도 조정/조율을 해. 다만 정치 문화가 이렇다고 해서 입법폭주를 의회 내에서 전면적으로 막을 수 만도 없지. 내각제는 결국 원내 다수당의 손을 들어주는 시스템이니까 말이야.
다만 내각제 또한 대통령제처럼 통치 시스템일뿐, 원칙적으로 국민 사이에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입법폭주도 결국은 막히게 돼. 캐나다 정치사를 보면 입법폭주 또는 민심과 동떨어진 무리한 통치를 한 정당은 꼭 다음 총선에 정권을 내놓거나 최소한 지도자 물갈이는 일어났어.
예컨대 하퍼 총리의 보수당 정부는, 꽤 인기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 개혁(혜택 축소안)을 밀어붙였다가 2015년 정권을 내놓았어. 가장 최근에는 자유당의 트뤼도 총리가 상징성만 있는 정의 추구와 비효율적인 복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민정책을 추진했다가 당 안팍으로 여론이 나빠져서 자리를 내놓았지. 즉 이런 점만 봐도 내각제 토대로도 정권/인물 교체는 다이나믹하게 잘 이뤄진 편이야.
즉 내각제 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아. 캐나다 사회에 살아온 시선으로 볼 때 매력적인 면들이 많아. 당 중심이기 때문에 당원 여론이 위로 전달이 잘되는 점이라든가, 어느 정도 지역성을 넘어설 수 있는 점, 당론으로 결정된 정책이나 방향성은 인물이 바뀌어도 오랫동안 추진할 수 있는 점 등등.
정치인들이 무슨 꿍꿍이로 특정 제도를 들고 왔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어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구인 제도 자체에 너무 정치색칠을 하고 보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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