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상식백과(31)] 1793년, 북극성이 자유를 상징하던 시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흑인 노예 탈출을 도운 캐나다인과 미국인 기독교인 조직이다. 캐나다인뿐만 아니라, 미국인도 가담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고 부른 이유는, 탈주자와 경로를 철도 용어에 빗대 음어로 불렀기 때문이다. 예컨대 탈주 노예는 ‘승객(passengers)’이나 ‘화물(cargo)’ 등으로 불렸다.
중요한 역할은 탈주할 노예를 찾는 ‘티켓 판매원(Ticket Agents)’과 안전 가옥을 운영하는 ‘역장(station master)’이다. 이들은 미국 남부에서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탈주한 노예를 보호하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
탈주에 진짜 철도를 이용한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마차를 이용했다. 캐나다에서는 약 3만~4만명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이용해 영국령 북아메리카(현재 캐나다)에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1793년 어퍼 캐나다에는 노예제한법(Act to Limit Slavery)이 발효해, 노예는 도착 즉시 자유민이 된다고 보장했다.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1865년 미국이 헌법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기 전까지 가동했다.

 

존 그레이브스 심코

심코와 쉐드
북미 노예제 폐지에 공있는 사람들… 존 그레이브스 심코 총독(좌)과 매리 앤 쉐드 캐리(우)/ 자료원=캐나다 국립 도서관

어퍼 캐나다의 심코 총독은 노예제도 폐지뿐만 아니라, 현재 토론토(Toronto)가 된 요크시(City of York)를 처음 만든 사람이다. 18세가 되던 1770년 영국에서 영국군에 입대해, 이후 아메리카 혁명전쟁(미국 독립전쟁)에 파병돼 중령(Lieutenant Colonel)까지 승진했다. 전후에 영국으로 귀국했다가 39세에 어퍼캐나다 총독에 임명됐다.
심코 총독은 이상적인 왕당파 사회를 건설해, 미국 공화주의자에게 과시할 생각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그의 생각은 현실에서 오히려 진보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그는 미국의 노예제도에 반해 노예제한법을 추진했다. 미국의 원주민 전쟁에 반해, 일부 원주민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캐나다 시민권 교재는 심코 총독을 대영 제국 노예제도 폐지에 선구자로 본다.

매리 앤 쉐드 캐리

매리 앤 쉐드 캐리(Mary Ann Shadd Cary)는 1823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성 운동가다. 캐나다 시민권 교재는 쉐드-캐리를 다른 흑인 활동가보다 비중 있게 다룬다. 캐나다의 노예주의 반대 사상을 미국 사회에 전달한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매리 앤의 아버지 아브라함 쉐드는 자유민이었지만, 미국 내 흑인 차별로 자녀가 교육을 받지 못하자 1850년대 캐나다로 이주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 자란 매리 앤은 지식인에 흑인 인권에 열의가 강한 인물이었다. 1851년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 후, 그녀는 자기 의견을 담아내기 위해 1853년에는 캐나다 최초의 여성 발행인이 된다.
‘더 프로빈셜 프리맨(The Provincial Freeman)”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해, 노예제도 반대, 캐나다 이민 흑인을 위한 정보, 금주 운동인 템퍼런스 운동(temperance), 영국 지배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1856년 토마스 캐리와 결혼하지만, 1860년 남편 사별로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난다. 이후 남북전쟁(Civil war) 직전 미국으로 귀국해, 남북전쟁 중에는 흑인 모병관으로 활동한다. 전후에는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하워드대에서 법학을 공부 60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이후에는 별세할 때까지 여성참정권 운동을 벌였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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