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최고의 권력자와 최고의 재산가가 도와주면, 그 인생은 쉽게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는 게, 에바 고티에(Eva Gauthier)란 사람의 인생 초반 얘기야.
그렇다고 실패담은 아니야. 고티에 인생 후반의 이야기는 자기의 길을 찾았을 때 후대에도 추앙받는 전성기가 찾아온다는 얘기니까.
당시 신생국, 캐나다의 소위 있는 집 자식
에바 고티에는 1885년 10월 20일 오타와에서 태어났어.
소위 있는 집 아이였지만, 당시 여자가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제한적이어서, 음악 교육을 가정교사에게 받았다고 해.
그 결과로 당시 캐나다 엘리트가 모이던 오타와의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 열세살 때 솔로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 이때 동네에서 노래로 알아주는 아이였다면, 열일곱살 때는 빅토리아 여왕 추도식 때 전문 성악가로 지명돼 데뷔하면서 오타와에서 알아주는 숙녀가 됐지.
대게는 이쯤에서 파티 초대로 왕래하다가 혼담이 오간 집에 시집가는 게 19세기 말 20세기 초 고티에 같은 브르주아 집안 여성의 삶이었겠지만, 고티에는 주위에 워낙 훌륭한 분들이 많았고, 이 양반들은 고티에의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줬으면 했지.
당시 캐나다에서 성공의 공식은, 유럽에 유학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거였어. 1902년 7월, 17살 고티에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지.
이때 유학의 후견인은, 그녀의 삼촌이었던 윌프리드 로리에 캐나다 당시 총리. 그리고 스트라스코나경이었어. 스트라스코나경은 허드슨베이사 대주주이자, 몬트리올 은행 창업주로, 쉽게 말해 당대 캐나다의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지.
즉 최고 권력자와 재계의 최고 인사가 유학을 보내 준거야.

요즘 한국에 빗대면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 후원으로 성악 배우러 유학 갔으니 순탄히 공부하고 귀국하면 성공은 따놓은 당상 같지만,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진 않았어.

유학 직후 성대 결절
인생이 막 피어날 시점에 건강이 발목을 잡았지.
당대 프랑스 성악의 정상급들에게 교육을 받으러 유학 간지 얼마 안돼 성대 결절이 발견돼.
결국 학업을 중단한 채 두 차례 수술을 받고 2년을 메조소프라노 목소리 회복에 써야 했지.
미래가 불투명해진 시점에 자크 부이라는 선생을 만나 성대결절로 잃어버린 가수의 목소리를 회복하면서 교육을 받게 돼.
어려울 때 지켜주고 도와준 사람이 최고로 기억되는 게 사람 사이에 당연한 일이어서, 고티에는 평생 유일한 스승은 부이라고 했어.
당대 유명 가수와 재력가의 밀어주기
다른 나라 가면 동포가 더 무섭다는 슬픈 말도 이민 사회에 돌지만, 아닐 수도 있지.
1905년, 같은 캐나다인이자 가수 선배인 엠마 앨버니가 고티에를 유럽 무대에 올려주게 돼. 앨버니는 영국과 캐나다에 자신의 고별 투어 공연을 하는데 고티에를 데리고 다니면서 무대 경험을 쌓게해주지.
여기에 또 한번 지인 찬스가 발현되는데, 영국왕 에드워드 7세 대관식 기념 공연에서 스트라스코나경 추천으로 소프라노로 무대에 서게돼.
당시 대영제국의 황제 대관식에 가수로 나섰는데, 이게 요즘 말로 스펙에 도움이 안 될 수가 없지.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단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유럽 각지 공연에 나서게 돼.

출연 직전에 사라진 자리
그러나 1910년에 결정적인 일을 경험하면서 오페라단을 그만두게 돼.
오페라 라크메에서 말리카 역으로 캐스팅됐는데, 막이 오르기 직전에 교체돼 무대에 오르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 거야.
일설에 따르면 루이사 테트라치니라는 프리마돈나가 고티에의 목소리를 질투해 그녀를 캐스팅에서 빼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얘기가 있어.
갑질을 당한 거지.
혹은 테트라치니에 대한 언급 없이 고티에 스스로가 오페라 무대와 맞지 않다고 판단해 그만두었다는 기록도 있긴 해.
다만 오페라 사건 이후에도 다른 기회가 있을 때에 계속 무대 위에 선 걸 보면, 첫 번째 얘기가 더 그럴 듯 하지.
이후 고티에는 오페라단을 그만두면서, 주변의 엄청난 기대와 도움으로 시작한 유럽 생활을 그렇게 8년 만에 청산하게 돼.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그녀의 음악 세계
기분 전환에는 여행이 최고지.
고티에는 여행지로 ‘동방’을 선택했어. 정확히는 지금 인도네시아로 불리는 당시 자바로 떠났지.
자바에서는 예전 성악을 같이 배우던 동문이던 프란즈 누트가 있었고, 소위 썸 타던 사이였나 봐.
플란테이션 관리자였던 누트가 초대했고, 고티에는 그에 응했지.
결국 둘은 1911년 결혼도 하게 돼.
멀쩡하게 다니던 유명 오페라단을 배역 못 받았다고 때려치우고, 멀리 별 인연도 없는 나라에 가서 갑자기 결혼이라니 평범하진 않지. 남다른 점이 또 하나 더 있어.
유럽인들이 무시하던 자바 전통음악인 가믈란을 고티에는 배운 거야.
“유럽인이 무시했다”는 사실 캐나다 역사서에는 없는 말이지만, 생각해보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침공해서 식민지화 하기 시작한 게 17세기 초인데, 그때 이후 서양에서 교육받은 음악가로 가믈란을 공부한 건 고티에가 처음이라고 하네.
성악가가 판소리 배우는 격인데, 이런 공부가 그녀에게 새로운 영역의 문을 열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계속 공급하게 돼.
고티에는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등을 다니면서 리사이틀을 하고, 이런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형성하지.
아시아 활동은 3년 만인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끝나고, 이후 자바를 빠져나와 미국 하와이로, 다음은 뉴욕으로 거쳐를 옮기게 되지.

예술과 결혼하기 위한 이혼
1915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스물아홉살 고티에는 결혼이 자신의 음악 활동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아들이 있었지만, 남편과 이혼했다네.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한 게 아니라, 남편과는 이후에도 친구로 계속 잘 지냈다고 하는군.
요즘이야 비혼이나 졸혼 얘기가 있지만, 고티에는 한 세기 앞서 산 사람이란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앞서간 셈이야.
이 지점부터 고티에는 자기 색깔을 통해 잘 알려진 예술가의 자리에 올라가게 돼.
전반이 오페라 가수였다면, 후반은 문화를 주도하게 된 도시, 뉴욕에서도 통하는 리사이틀 전문 가수로 변신이 일어나지.
뉴욕에서 신고전주의를 소개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뉴욕은 마치 유럽 예술가들의 피난처 같은 곳이 됐어.
그 때문에 온갖 장르의 음악과 음악가들이 쏟아지듯 뉴욕에 들어왔고, 웬만한 실력과 특색이 있지 않고서는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고 해.
음악가로 고티에는 이국적인 자바 음악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었어.
자바 의상을 입고, 춤을 추듯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요즘으로 치면 버라이어티쇼 장르인 보드빌에서 송모션(Songmotion)이란 제목으로 통했어.
예술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그녀는, 불어계 캐나다인이 가진 또 다른 무기인 불어로 다른 유럽계 작곡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어.
특히 모리스 라벨이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신고전주의 작곡가들의 곡을 미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뉴욕 음악계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지.
그녀에게는 현대 가곡의 고위 여사제(The High Priestess of Modern Song) 라는 별명이 붙었고, 여기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게 돼.

새로운 시도, 재즈
고티에가 소개하는 신고전주의나 모더니즘 음악은 클래식의 영역에 들어가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흐름이었기 때문에 평단으로부터 비판적인 평가도 많이 받았어.
지금은 클래식 대가의 반열에 오른 조지 거슈인의 음악을 1923년 클래식 음악가로는 처음으로 공연하기도 하고.
진짜 클래식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고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더 파격적인 시도를 하는 리사이틀을 주최했지.
당시에는 춤추는 데나 적합한 ‘저질(low)’이라고 폄하되던 재즈를 클래식 공연에 집어넣었어.
고티에는 아예 자신의 공연 제목을 “고대와 현대 목소리를 위한 리사이틀(Recital of Ancient and Modern Music for Voice)”이라고 정하고 광범위한 음악을 소화해내. 여기에는 오페라, 신고전주의와 모더니즘, 재즈, 당대 대중가요나 민요까지 모두 등장하지.
전통의 벽을 깨버리고, 다양한 음악이 섞이는 공연을 만들어냈고, 비평가들은 뭐라 할지언정, 작곡가들은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그녀의 공연에 환호하고 모여들었어.
고티에는 거슈인의 곡을 특히 사랑했고, 거슈인도 그녀의 공연에 참여하면서 큰 성공을 거둬.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클래식으로 듣는 음악 중 하나인,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를 거슈인이 1924년 세상에 선보이게 돼. 혹시 노다메 칸타빌레를 봤다면, 맞어 거기서 나오는 그 음악.
고티에의 활동 무대는 미국 중심이었지만, 캐나다에서도 고티에는 자기의 영역을 개척한 음악가로 알려지게 돼.
1927년 캐나다 연방 건국 60주년을 맞이해 고티에는 전국에 방송되는 축가를 부르는 영광을 누리지.
지금으로 보면 국민 가수 인정을 받은 거야.
대공황의 파도에 교육자의 길
그러나 많은 음악가들과 예술가의 활동을 멈추게 한 1929년 대공황의 파도는 고티에의 전성기 역시 휩쓸어 갔어. 사람들이 거리에 내몰리게 된 상황에서 예술이 설 자리는 매우 좁았지. 고티에는 재정난에, 병까지 얻게 돼 활동을 중단해.
1931년 45세 나이에 아바나에서 공연을 재개했지만, 계속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어.
생계의 방법으로 고티에에게 오페라 가수의 길을 열어줬지만, 같이 대공황의 파도에 휩쓸렸던 엠마 앨버니와 함께 음악 교육자로 일하기 시작해. 1930년대 중반에 다시 성악가로 공연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공연 횟수는 전보다는 현저 준 상태였고, 결국 1937년에는 은퇴를 하게 돼.
은퇴 이후에도, 음악계에는 계속 남아서 마스터 클래스로 성악을 가르치거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고 하네.
1958년 73세로 별세할 때까지의 고티에의 삶은 교육자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어.

그녀를 기억하는 키워드, 현대 가곡의 여사제
인생에서 비중으로 보자면 교육자로 더 오랜 세월 보냈지만, 캐나다 역사서들은 그녀를 현대 가곡의 고위 여사제로 기록하고 있어.
노래를 잘하는 소녀에게 배려로 주어진 정형화된 성공의 길보다는, 결국 그녀가 의지를 갖고 택한 길이 그녀 인생의 키워드로 남은 거야.
여성의 활동이 무척 제한됐던 20세기 초반에 평론가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길을 걸었던 고티에의 삶은 두 딸을 둔 아빠로서 흥미롭기에 소개해봤어.
이 글에 함께 띄운 음악은 워낙 옛날 거라 잡음이 심한 모노이긴 한데, 가수 얘기하는데 노래를 안 들어볼 순 없잖아? 그래서 넣어봤고.
첫 이야기였고, 다음 이야기에서 또 만나. | JoyVancouver © 조이의 사람 이야기| 권민수
이 글의 참고 자료:
- The Canadian Encyclopedia: Eva Gauthier
- New York Public Library: Éva Gauthier papers
- Library and Archives Canada: Éva Gauthier, mezzo-soprano and voice tea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