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백과(24)] 17세기 퀘벡을 세운 사람, 드 몽과 드 샹플랑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등장

피엘 드 몽과 새뮤엘 드 샹플랑이 북미에 다시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 배경은 프랑스 국내 사정과 밀접하다. 1589년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앙리 4세의 유명한 선언 “하느님이 허락한다면, 왕국의 모든 신민이 일요일에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그 말대로, 앙리 4세는 스페인과 오랜 투쟁에 지친 프랑스를 다시 정비했다. 자신이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1593년 개종하면서 당시 가장 큰 갈등 원인인 천주교-개신교 대립을 정리했다. 개종 후 뒤늦게 대관식을 거행하고, 이후 신교 차별 금지법인 낭트 칙령을 발표했다. 모든 갈등을 일거에 잠재우진 못했다. 천주교로 개종했지만, 은근히 개신교 편을 들면서 12차례 암살 목표가 됐고, 결국 1610년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사이 앙리 4세는 프랑스 상업의 기반을 닦았고, 자체적으로 왕가 권력을 강화하는 길을 열었다.

모피 상인 피엘 드 몽

드 몽은 앙리 4세로부터 식민지 건설, 상업시장 개척, 아카디아 정부 구성에 관한 허가를 받았다. 드 몽은 전 유럽, 주로 왕가와 귀족을 상대로 북미산 비버 모피를 판매했다. 그 수입을 식민지 건설에 사용했다. 처음 북미에서 드 몽이 활동한 건 그의 나이 42세 때인 1600년부터 이후 7년 정도 였고, 대부분 북미에서 활동은 더 젊은 드 샹플랑이 했다. 드 몽 자신은 1607년 프랑스 귀국 후 다시 북미를 방문하지 않았다. 드 몽은 수익금을 재투자해 드 샹플랑이 세인트 로렌스강 일대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퀘벡시 드 몽 동상
퀘벡시 드 몽 동상. 사진=Wikimedia Common

유능한 수완가 드 샹플랑

드 샹플랑은 36세 때인 1603년에 프랑스에서 당시 누벨프랑스로 불리던 북미에 왔다. 이후 프랑스-북미를 오가다가 1608년 부터 드 몽 후원으로 세인트로렌(생로렝)강 일대에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 활동을 한다. 그는 1635년 퀘벡시티에서 사망할 때까지 누벨프랑스 건설에 전력했다. 앞서 50년 전 카르티에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은 이유가 있다.
드 샹플랑과 비버 모피 수출이라는 분명한 재원이 있었다. 외교를 활용했다. 알곤퀸(Algonquin) 몽태그네(Montagnais) , 휴론(Huron) 등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적대적인 이로쿼이를 제압했다. 프랑스-원주민 동맹에 참여한 원주민은 처음에는 5개, 후일 6개로 늘어난다. 결국 1701년 프랑스-이로쿼이는 평화 협정을 맺는다.

프랑스에서도 계속 인재 투입

누벨프랑스에는 드 샹플랑 외에도 유능한 인재가 뒤따랐다. 누벨프랑스의 최초 행정관으로 활동한 장 탈롱(Jean Talon), 최초의 캐나다 가톨릭 주교인 프랑수아 드 라발(François de Laval) 또는 비숍 라발(Bishop Laval), 군인이자 뉴 프랑스 총독이었던 루이 데 부데 프론테넥 또는 카운트 프론테넥(Count Frontenac) 같은 인물이 허드슨 베이에서 멕시코만까지 북미에 새로운 프랑스 제국을 만들었다. 이들은 각각 행정, 종교, 군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식민지 개척에는 일정 수입과 지출을 조정할 행정, 식민지민을 정신적으로 아우를 종교, 세력 확장과 유지를 위한 무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누벨프랑스를 가만히 보지 못하는 나라가 하나 있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Share this article

Recent posts

Google search engine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