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목요일)

[상식 백과(22)] 스페인 통일이 캐나다 역사에 결정적 영향

15세기말 스페인 통일로 확장

15세기말 스페인은 레콩키스타, 즉 자국 내 이슬람 축출 전쟁을 벌여 1492년 1월 그라나다 함락으로 승리했다. 스페인은 통일이 이뤄지자, 그 힘을 당장 외부로 돌렸다. 같은 해 8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 후원으로 1차 항해를 떠나, 바하마, 쿠바 등을 탐사한다. 이런 결정은 선견지명이 아니라, 포르투갈 따라잡기였다. 앞서, 포르투갈은 15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 탐사에 나서, 노예 사업으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또 포르투갈인 바톨로메우 디아스가 1488년 아프리카 최남단에 도착해 유럽-인도 항로가 반 이상 완성된 상태였다.
1494년 유럽 외 다른 지역을 스페인-포르투갈이 나눠 소유한다는 내용으로 교황 중재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두 나라가 유럽외 다른 지역에 영토를 선포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유럽인의 ‘개척’은 20세기 초까지도 두 나라 방식을 전범으로 했다. 탐사선 해안 측량 → 상륙 및 자국령 선언 → 식민지 개발. 대개는 식민지 개발 단계에서 ‘이교도’ 원주민을 억압했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탈리아, 장거리 항해 시작

스페인 통일은 이탈리아에도 중요했다. 지도를 보면 스페인 남서편 끝에 지브롤터를 볼 수 있다. 지중해가 입이라면 지브롤터는 윗입술이다. 이곳에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이 상주할 때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기 어렵다. 이곳이 열리면서, 도시국가 르네상스가 한창이었던 이탈리아에게도 길이 열렸다.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은 상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아 뻗어날 곳을 찾고 있었다. 이탈리아인 콜럼버스의 소위 ‘발견’은 다른 이탈리아 항해사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자극 받은 유럽 다른 나라도 나서

두 나라의 활동은 다른 유럽국가,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 상당한 자극이 됐다. 당시 다른 나라 보다 세력이 작았던 영국은 헨리 7세의 명으로 콜럼버스로 인해 인기가 한껏 높아진 이탈리아계 ‘탐험가’를 고용했다. 그 사람이 존 캐벗이다. 프랑스는 16세기 초부터, 본격적인 경쟁에 나선다. 존 캐벗의 이탈리아식 본명은 조반니 카보토로 원래는 제노바 출생 베네치아 공화국 사람이다. 캐벗의 항해는 논란이 있다. 기록이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캐벗은 원래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탐사하겠다고 나섰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캐벗의 항해 내용을 증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러나 캐벗의 항해는 영국이 뉴펀들랜드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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