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북미 지배

7년 전쟁이 끝난 후,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북미 영토를 완전히 확보한 영국은 두 종류의 위민 정치를 했다. 그 주역은 앞서 식민지 우선 승리 전략을 세웠던 대(大)피트 총리,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백작이였다. 첫째, 1763년 왕실 포고문(Royal Proclamation)을 통해 애팔래치아 산맥 서편을 원주민 지역으로 선포했다. 둘째, 영국계와 불어계 이중문화(bicultural) 현실을 인정했다. 그게 퀘벡법이다. 새로운 방식이 아닌 제국 통치 기본이다. 여러 민족을 아래에 둔 제국은 납세와 부역 의무만 하면 종교를 포함한 문화는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게 고대부터 당연했다. 다만 원주민 지역 선포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부분이었다.
앞서 영국-프랑스 전쟁 원인을 보면 뉴잉글랜드 식민지민의 오하이오 개척에 있었다. 영국은 이런 유럽계와 뉴잉글랜드 식민지민의 서진 움직임을 조정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왕실 포고문에는 “왕실에서 구매하지 않는 한” 원주민 땅이라는 조건문이 들어갔다. 또 식민지민의 자치를 허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영국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했고, 7년 전쟁을 치르며 북미에 늘어난 군대를 유지하고자 했다.

원주민의 저항

위민 정책 발표 순서를 보면 원주민이 퀘벡민보다 먼저다. 이유가 있다. 원주민 국가 연합체가 1763년 4월 영국군을 상대로 5대호를 두고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지도상 프랑스령에 포함됐지만, 실상은 원주민 영토를 다스리는 데 문제가 있었다. 특히 영국군 사령관 제프리 애머스트(Jeffery Amherst)는 5대호 인근 원주민을 정복하려 했다. 원주민은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에서 이겼지만, 자신들의 땅에 대해 승리한 건 아니라고 경고했다.
특히 7년 전쟁 중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원주민은 위기감을 느꼈고, 결국 원주민 12개국이 연합해 영국을 몰아내려 했다. 일부 원주민은 연합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이걸 오브완디약(Obwandiyag), 영어식으로 폰티악(Pontiac) 오타와족 추장의 ‘음모’로 여겼다. 1763년 10월 왕실 포고문은 원주민 연합군과 한참 전쟁 중에 나왔다. 결과적으로 에머스트의 야심은 일단 중단됐다.
영국과 폰티악 사이에 1764년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5대호 인근을 이미 개척했다며 토지 소유권을 주장해온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민은 이런 영국 조처를 매우 불만스럽게 봤다. 한편 원주민 전쟁이 계속 이어지지 못한 배경에는 천연두 확산이 있었다. 애머스트가 원주민에게 천연두균을 묻힌 담요를 줬다는 기록이 있다.

북미 운영, 세금이 가장 큰 문제

영국은 18세기 들어 이전 식민지 교역권 판매로 이익을 취하던 방식에서, 점차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해 정부 수입을 늘리기 시작한다. 식민지가 늘어나면서, 자국과 식민지 상품에 대한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과 영국령은 관세를 면세하고, 다른 유럽 국가 식민지산에는 과세해 경쟁력을 키우고자 했다. 또한 차별은 영국 본국과 영국령 식민지 사이에도 존재했다. 예컨대, 1750년 제철법(Iron Act)은 뉴잉글랜드에서 철광석 생산은 허용하지만 제철은 금했다. 즉 산업 발전을 막았다.
또한 1764년 설탕법(Sugar Act)은 뉴잉글랜드와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식민지 간에 설탕 중개무역을 제한하고, 앞서 7년 전쟁에 전비를 회수하고자 만들어졌다. 설탕법을 시작으로 유사한 법이 차와 커피, 모직으로 확대돼, 뉴잉글랜드인 사이에 세금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본국에 적용되지 않는 법이라 차별 당한다는 의식도 생겼다. 특히 뉴잉글랜드 모든 출판물에 인지세법(1765년)을 도입해 언로를 통제하려 하자 뉴잉글랜드 언론인, 대표적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은 공공연히 반란을 사주하기 시작했다.

퀘벡전투에서 대패한 미국 독립군

이런 뉴잉글랜드 움직임을 본 영국은, 퀘벡이 뉴잉글랜드와 동맹할 가능성을 도려내려고, 퀘벡법을 발표한다. 이 퀘벡법은 뉴잉글랜드인에게 독립해야 할 이유, 즉 ‘참을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가톨릭의 박해를 피한 프로테스탄트 후손인 뉴잉글랜드인은 퀘벡이 영어권으로 전환 개신교인화 해야, 북미가 일정한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이 불만은 뉴잉글랜드인의 영국 의회 진출 문제와 함께 대륙회의에서 다뤄졌다.
결국 영국이 대륙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민 억압을 강화하자, 1775년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소위 독립전쟁 또는 영국 입장에서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퀘벡인 봉기를 기대하며 퀘벡으로 출정하나, 1775년 12월 31일 대패한다. 이 지점부터 캐나다와 미국의 역사와 정치적 입장은 확연히 갈라선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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