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회사와 군대의 얼굴로 등장하다.

프랑스가 북미에 세인트로렌(생로렝)강 일대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만드는 동안, 영국은 좀 더 남쪽에 현재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1607년 첫 정착지로 세웠다. 영국은 이후 뉴펀들랜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정착지 마련을 시도했지만, 1620년대 이후에야 제대로 된 정착지를 갖출 수 있었다. 영국은 뉴펀들랜드를 해군기지로 삼고, 각 지에 회사를 세워 점점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군대가 영업을 보장하는 가운데, 회사는 무역을 통해 수익을 올렸고, 이 수익은 일부를 식민지 개척에 사용했다. 영국이 북미 개척에 나선 적극 나선 배경에는 유럽 열강 사이 경쟁도 있었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다.

올리버 크롬웰, 청교도의 나라를 꿈꿨다

북미를 키운 건, 종교대립이었다. 가톨릭과 신교의 대립은 권력투쟁 수준을 넘어, 기득권인 가톨릭이 개신교를 학살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개신교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1648년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호국경이 됐다. 국내 상황을 정비한 크롬웰이 한 일은 당시 무역 강국이던 네덜란드의 뱃길을 빼앗으려는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결국 두 나라는 제1차 영란전쟁(1652~1654)에 돌입한다. 여기서 승리한 크롬웰은 북미로 가는 뱃길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이 뱃길에 크롬웰은 청교도를 태워보냈다. 그가 북미에서 꿈꾼 건 청교도의 나라였다. 대부분 청교도는 직업 상인이었다.

크롬웰과 철기병. Andrew Carrick Gow작.
크롬웰과 철기병. Andrew Carrick Gow작.

찰스 2세, 호국경보다 나은 왕이고 싶어했다

1658년 크롬웰이 병사한 후 귀국한 찰스 2세는 1660년 귀국한다. 그는 이듬해 크롬웰의 관을 꺼내 부관참시하고, 그 추종자를 제거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단순히 복수에 눈먼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크롬웰이 정비한 군대를 활용해 영국 세력 확장에 나섰다. 그는 호국경 크롬웰보다 더 훌륭한 왕이라는 걸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은 1664년 뉴네덜란드를 침공,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개명한다. 뉴저지 일대도 점령해 뉴잉글랜드의 일부로 삼았다. 이 전쟁은 제2차 영란전쟁(1665~1667)으로 이어진다. 1차와 다른 점은 북미에서 영국 세력 확대를 본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에 섰다는 점이다. 찰스 2세는 뉴잉글랜드 확장에는 성공했지만, 당장 훌륭한 왕이란 칭호를 얻진 못했다. 그 배경에는 1665년 런던 흑사병 창궐과 이듬해 대화재, 2차 영란전쟁에서 사실상 패전 등이 있다.
제2차 영란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The Admiral

뉴잉글랜드의 번성

영국 식민지는 결국 대서양 연안을 아우르게 됐다. 이들은 영국에 속했지만, 일종의 청교도 연맹의 형태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청교도의 이민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상인이자 선원인 이들은 일대에서 부를 이루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은 주로 상권 인허가 과정에서 이득을 취했다. 원래 허드슨스베이 컴패니를 제안한 사람은 프랑스인 비버 모피 상인 메다드 슈아 데 그로실리에( Médard Chouart des Groseilliers)와 그의 처남 피에르-에스프리 래디슨(Pierre-Esprit Radisson)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왕실에 먼저 캐나다 내륙 상업 독점권을 가진 회사를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경쟁자가 있는 상황에서 그 조건은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루퍼트 왕자에 접촉해 영국 왕실에 제안했다. 일정 영역을 탐사하고, 그 지역 상업 독점권을 갖는 주식회사를 영국왕실이 받아들였다. 1670년 허가한 사업 영역이 허드슨베이와 그 주변 강을 모두 아우루는 거대한 땅 ‘루퍼트 랜드(Rupert’s Land)’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루퍼트랜드 영역도.
루퍼트랜드 영역도. 자료원=Creative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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