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상식백과(20)] 북미 원주민에 대해 잘못 알고 있지 않나요?

편견의 수정이 필요하다

캐나다 역사서는 대부분 콜럼버스의 북미 대륙 ‘발견(discovery)’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유럽인의 북미 대륙 ‘탐사(explore)’를 다룬다. 발견과 탐사, 두 표현 사이에는 사회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발견’이라고 하면 원주민을 인정하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원주민 일부는 정착민이다

또 다른, 원주민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 원주민을 대부분 유목민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원주민은 정착민이었다.
“5대호의 휴론-웬다트(Huron-Wendat)라고 부르는 원주민 연합체를 보면, 이로쿼이(Iroquois)는 농부이자 사냥꾼이었다. 북서부의 크리(Cree)와 딘(Dene)은 사냥꾼-채집자였다. 수(Sioux)는 유목민이었는데, 바이슨(버펄로) 무리를 따라 다녔다. 이누이트(Inuit)는 북극권 야생동물에 의존해 살았다. 서부 해안 원주민은 생선을 말리고 훈연했다. 원주민 간에 땅, 자원, 재화를 둔 전쟁은 흔했다.”

유럽인 등장이 원주민 삶을 바꿨다

“유럽인이 대거 북미에 상륙하면서 원주민의 삶은 영원히 전과 달라졌다. 유럽인은 무역상, 선교사, 군사, 식민지 이주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수많은 원주민이 유럽인이 가져온 병에 면역성이 없어 숨졌다.” 캐나다 시민권 교제는 이후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도 원주민은 초기 200년간 유럽인과 강한 경제적, 종교적, 군사적 유대를 통해 공존했고, 이 관계가 캐나다의 초석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이 관계’란 피정복민과 정복민의 관계라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앞서 살펴봤듯이 원주민 문화와 언어, 종교는 탄압과 억압의 대상이었다. 원주민의 땅은 영국왕실과 토지매수 계약 등을 통해 캐나다로 넘어갔지만, 이 계약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점은 현대에 와서 조명받는 사안이다.

원주민 시각에서 생각해볼 필요 있다

원주민 시각에서 한번 생각해보라. 가족 중 많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숨졌다. 그 사이 유럽인이 와서 내가 농사짓던 땅을 차지했다. 땅에서 내몰려 천막을 치고 사는 데 그마저도 계속 밀려났다. 뭔가 서명을 요구하고, 서명하면 담요 등 약간의 상품을 주고는 쫓아냈다. 그 와중에 유럽인이 다수가 되자, 내 손자는 “원래 그렇게 야만적인 떠돌이에 심성이 게을러 사회 부적응자”라는 대접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원주민은 1970년대부터 존중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성과는 1990년대에 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일부 캐나다인은 원주민 대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는 상당 부분 역사에 대한 무지나 고의적 무시에서 발생한다. 적지 않은 원주민이 도심지역 극빈자로 생활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캐나다를 누리며 사는 사람에게는 역사적 부채가 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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