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탐험가가 처음 명명한 아카디아

아카디아인이 사는 아카디아(Acadia)는 현재 캐나다 대서양 연안을 말한다. 원래는 그리스 지명이다. 조반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란 이탈리아 탐험가가 1524년부터 25년 사이 프랑스왕 명으로 대서양과 면한 북미를 탐사하고 미국 델라웨어를 아카디아라고 명명했다.
델라웨어는 미국 워싱턴 DC와 필라델피아 사이에 있는 주다. 그러나 이후 지도 제작 과정에서 아카디아는 더 넓게 북쪽을 포함해 그려져 현재 노바 스코샤와 뉴브런즈윅, 뉴펀들랜드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 들어가게 됐다.

17세기, 총 들고 깃발 꽂은 유럽인이 세계의 주인 행세한 시절

본격적인 식민은 프랑스가 1630년대에 시작해, 한 세대에 걸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북미 상륙을 시작한 영국과 분쟁으로 아카디아는 1654년 영국 손에 넘어간다. 이를 다시 1667년 프랑스가 재점령하고, 1690년 다시 영국이 쳐들어온다. 이어 1697년 다시 프랑스에 넘어간다.
척박한 땅에 적은 인구가 사는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에, 북미 식민 부대나 심지어는 국가 공인 해적인 사략선을 타고 온 소규모 병력이 일정 지역을 일정 기간 점령하면, 본국 조약 협상으로 소유권을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땅의 주인은 매번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뿌리를 내렸다. 결국 1755년, 초기 식민 이후 근 4세대가 지나서, 현재 노바스코샤 지역에 약 1만3,000명이 아카디아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살게 된다.

아카디아인 여성
아카디아인 여성. 기록화. 자료원=캐나다 국립 도서관 기록보관소

스페인 왕위 계승 때 넘어간 아카디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때부터 유럽 열강 사이 전쟁 결과가 아카디아인의 운명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영국-프랑스가 위트레흐트 조약(1713년)을 맺는 과정에서 현재 노바스코샤에 해당하는 아카디아 반도가 영국에 통째로 넘어간다. 프랑스는 유럽 본국 영토를 잃지 않는 대신 북미 영토를 넘겼다.
아카디아인은 자신들이 프랑스 왕실의 협상용 동전 정도로 쓰인 점을 인식하고 독립의식을 갖게 된다. 이런 아카디아 반도를 넘겨받은 영국은 당장 점령 인력도 부족한 상태로, 원했던 목표인 영토와 신민을 접수에 만족해 처음부터 아카디아인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단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려고, 포트로열을 애나폴리스 로열로 변경해 직접 통치했다.
또 차츰 영국계를 식민하면서 핼리팩스를 군항으로 삼고, 점차 인근 지역을 지배할 요새를 늘려나갔다.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현재 케이프 프레튼 아일랜드인 일레 로얄에 루이스버그(Louisbourg)를 건설해 북미 대서양 연안 해군 기지로 삼아 설욕 기회를 엿봤다.
그 옆에 현재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당시 일레생쟝은 루이스버그 물자를 제공하는 병참기지로 했다. 어느 정도 통치권을 확립한 영국은 1729년에 아카디아인에게 무조건 충성 서약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아카디아인이 프랑스 편에 설 가능성을 우려한 조처로, 이 서약을 통해 완전한 복속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카디아인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중립 서약을 대신 제안하고, 봉기를 우려한 영국 당국은 1730년 말로 중립 서약을 받는 선에 그쳤다.

1754년 아카디아 지도
7년 전쟁 직전 아카디아. 지도=위키피디아(CC)

또 다른 왕위 계승 전쟁이 운명을 정했다

아카디아인 다수 운명을 정한 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년)의 여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에서 다시 맞붙는데,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영국은 뉴잉글랜드(현재 미국 동부) 식민을 통해 충분한 상륙 병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결국 눈엣가시로 여겼던 프랑스의 루이스버그를 1745년 차지했다.
그러나 전후 엑스라샤펠 조약(1748년)에서 루이스버그를 다시 프랑스에 내주자, 뉴잉글랜드 여론이 들끓었다. 본국(영국) 정부가 식민지 군대의 피로 세운 성취를 무시했다는 분노가 펴졌다. 당시 중요한 건 대서양을 통해 유럽 본국과 연결하는 뱃길이다. 안정적인 물자와 재화, 인력 확보, 즉 뉴잉글랜드 생명선이 그 뱃길 유지에 달렸다. 그걸 위협하는 루이스버그를 점령했는데, 다시 내주었으니 뉴잉글랜드 주민 사이에서는 위협 요소를 다시 불러들인 꼴이었다.
그 분노는 약자를 향했다. 아카디아 반도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면 충성스러운 영국인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결국 1749년 아카디아 반도를 노바스코샤로 개명하고, 영국계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우방이었던 독일계(신성로마제국)를 식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755년 대서양 연안 영국령에서 아카디아인 소개령이 내려진다. 1만3,000명 중 1만1,316명이 쫓겨났다.

쫓겨나는 아카디아인
쫓겨나는 아카디아인. 자료원=캐나다 국립 도서관 문서보관소

남은 이들을 붙잡아 쫓아내기 위해 그해 겨울 영국군 700명이 파견된다. 이어 1756년 북미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는 전쟁인 7년 전쟁이 발발한다. 이때 대서양 연안에 남은 거의 모든 아카디아인은 이를 갈며 프랑스편에 섰다. 할아버지대부터 살아온 땅에 계속 남기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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