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캐나다군

한국전쟁, 캐나다군은 중공군을 주적으로 대항해 싸웠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한국 침공을 시작했다. 북한의 남침 3일 후, 레스터 B, 피어슨 당시 캐나다 연방 외무부장관은 미국의 군사적 주도 아래, 캐나다는 UN군에 참여해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발표했다. 북미 동부 시각 6월 25일 (한국은 26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통해 상임이사국 투표로 한국에 대한 UN 지원이 결정된 후, 캐나다는 일단 태평양에 있는 3척의 구축함, 아사바스칸, 키유가, 수를 6월 30일 파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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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초기에 투입된 캐나다 군함들. 위로부터 아사바스칸, 키유가, 수.

1950년 6월 30일 당일 루이 생로렝 캐나다 총리는 “평화의 유지는 자유국가들의 단결과 힘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라고 연설하고, 한국에 조속한 추가 지원 의결을 연방의회에서 촉구했다. 자유국가들의 단결과 평화수호 의지는 계속 남아 1956년 수에즈 위기 해결을 위한 평화유지군 창설에 공헌하게 된다.

파병할 지상군 부대 없었던 캐나다 상황

북한군에 의해 부산까지 밀려난 대한민국 구원을 위해 지상군 파병이 캐나다 내각 회의에서 연일 논의됐다.
문제는 당시 캐나다 군대의 상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평시로 전환하면서 많은 부대가 해체된 상태였다.

달리 표현하면 당장 보낼 부대가 없었다. 1950년 7월 19일 생로랭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캐나다 육군의 현존하는 일선 능력으로는 한국 파병이 불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캐나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캐나다는 군인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8월 7일 오로지 한국 파병을 목적으로 18개월 복무 조건의 캐나다군 특수부대(CASF) 창설안을 채택해 모병에 나섰다. 캐나다 현역 군인,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와 젊은 이들이 당시에는 이름도 잘 몰랐던 한국 파병에 자원했다.

캐나다 군 모병관은 국방부 장관에게 8월 10일 이렇게 보고했다.
“매일 400~500명의 지원자를 받았습니다. 대략 18~25세 사이로, 대부분 건강합니다. 오늘 253명을 건강 진단한 결과 3명만 부적합자였습니다. 대부분 좋은 배경과 적합한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 50%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입니다”

보낼 군대가 없다고 총리가 밝힌 지 한 달만에, 그리고 파병 지원자 모집 단 일주일 만에 CASF는 8월 15일에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대 제2 대대(이하 패트리샤 대대)로 편성돼 캘거리 인근 웨인라이트 기지에서 훈련에 돌입했다. 별도로 장교 지원자를 받아서 113명이 한국 파병에 자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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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한국 파병 자원자들을 보고 있는 브룩 클랙스턴 당시 캐나다 국방부 장관.(가운데). 사진=P. Plastow

파병 직전까지 한국 전쟁 상황 계속 급변

한국의 전황은 캐나다군 파병 직전까지 극적으로 계속 변했다. UN군의 1950년 8월 10일부터 20일 사이 인천 상륙 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수세에 밀렸던 한국군은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이어 1950년 10월 2일 함경남도 원산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은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내면서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뒀다. 이 때문에 패트리샤 대대원들은 한 때 점령지 평화유지 활동을 예상했다.

중공군의 침략으로, UN군 상황 다시 바뀌어

그러나 1950년 10월 19일 부터 중공군 7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침략하는 제1차 공세를 시작했고, 10월 25일에는 중공군과 UN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전황은 UN군에게 심각하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중공군 제2차 공세에 UN군은 11월에는 평양을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는 중공군 제 2차 공세에서 이뤄진 사건들이다.

이 시점에 캐나다는 미군의 수송 지원을 받아 11월 25일에 시애틀항을 통해 첫 육군 전투 부대, 패트리샤 대대를 파병했다. 패트리샤 대대는 병사 873명, 장교 45명으로 구성됐다.

패트리샤 대대는 12월 18일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상륙했다. 점령지 유지가 아닌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부산 상륙 3일 후 패트리샤 대대는 즉각 8주간의 현지 적응 훈련 장소인 경상남도 밀양으로 이동했다. 패트리샤 대대가 밀양에서 훈련을 하는 동안에 전선 상황은 더욱 악화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중공군 3차 공세에 다시 공산군에 함락 당했다. 일명 1.4 후퇴다.

패트리샤 대대
한국 밀양에서 훈련 이동 중인 패트리샤 대대원들. 사진=캐나다 국립도서관 문서보관소.

“중화인민공화국은 침략자” UN 결의안 통과

UN은 1.4 후퇴 후, 1951년 1월 38선으로 복귀를 조건으로 휴전 협상을 제안했으나, 중공은 이를 거부했다. 중공은 당시 중화민국 (타이완) 대신 UN에서 상임이사국 자리를 요구했다.

여기에 중공은 한반도에서 UN군에게 일격을 가해, 한반도 적화를 끝낼 심산이었다. 중공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보낸 UN의 군대를 전멸시킬 계획이었던 셈이다.

중공군 1~3차 공세에 밀린 UN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 상징적이지만, 외교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UN결의안 498이 1951년 2월 1일 UN에서 캐나다 등 44개국 찬성 아래 통과됐다.

UN결의안 498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규탄하는 내용이다. 이 결의안은 또한 한국 내 UN군에 대한 모든 UN회원국의 지원 요청과, 침략자(중공)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외교적 의미는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가진 소련이, 이 결의안이 통과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 등 서방 국가가 우려했던 소련의 참전은, 결의안 498을 용인함으로써 없을 거란 신호로 해석됐다.

역사적 의미로는 6.25 때 중국이 한국을 도왔다는 심각한 착각을 하는 일부에게 사실을 입증하는데 유효한 자료다. 결의안 498을 보면 중공의 한반도 침략과 UN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 감행을 비판하고 있다.

UN군의 반격, 선더볼트 작전

결의안 498이 나오기 직전인 1951년 1월 25일부터 1월 31일 사이, 미 8군단 매튜 리지웨이 중장 지휘 아래 한국-UN군은 한강 남쪽의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수색 및 소규모의 전초전을 치렀다. 이어 UN 결의안이 나온 다음에는 미국, 영국, 터키, 콜럼비아가 참가한 UN군과 한국군은 9만 4,000명의 병력으로 대규모 진격 전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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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볼트 작전 지도.

중공군은 1~3차 공세 승리는 했지만, 연이은 전투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1951년 봄철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기 위한 정비와 휴식 중이어서 초반에는 역습을 당했다. 그러나 선더볼트 작전 후반 중공군 또한 역습을 행해 UN군에 상당한 피해를 줬다.

선더볼트 작전으로 2월 20일 UN군은 한강 남안 점령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지만, 내용은 일방적인 진격이 아닌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였다. UN군 사상자가 9,000여명 발생했고, 중공군 역시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UN군의 증원은 필수였고, 미 8군의 요청으로 패트리샤 대대가 미 8군 제9군단의 제27 영연방 여단 소속으로 2월 6일 전선에 투입됐다.

캐나다군 서울 탈환부터 전방 참전 시작

리지웨이 중장은 선더볼트 작전에 이어 2월 20일부터 3월 6일 킬러 작전과 3월 7일부터 4월 4일 리퍼 작전을 연이어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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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작전 작전도.


킬러 작전부터 패트리샤 대대는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수색, 공격에 참여했다.
킬러 작전은 애리조나 라인으로 불리는 경기도와 강원도에 그어진, 원주-제천-영월을 점령하면서, 해당 지역 중공군과 북괴군 섬멸이 목표였다.
킬러 작전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애리조나선을 확보해 서울 동쪽의 적 세력의 압력을 분쇄한 UN군은 이어 리퍼 작전을 통해, 홍천-서울-춘천 수복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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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작전 작전도. 서부 전선.


킬러와 리퍼는 학살자와 저승사자를 의미해 홍보에 적당한 작전명은 아니라는 지적이 미국 내 있었지만, 리지웨이 중장은 공산군 섬멸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드러낸다며 이를 그대로 밀어붙였다. UN군은 공산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38선 북쪽으로 밀려나야 휴전 협정 테이블에 나올 거란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UN군과 한국군이 한반도 중부 주요 도시 수복에는 성공했지만, 공산군은 집요했다.

중공군의 춘계 공세와 가평 전투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군세를 보강해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춘계공세로 명명된 공산군의 재침략 작전에는 무려 70만 명이 동원됐고, 이 중 근 34만 명이 서울 점령에 나섰다. 방어하는 UN군은 비전투병까지 모두 합쳐서 41만 8,000명이었다.

두 개 주공 루트에서 UN군을 만나면 여러 갈래로 쪼개서 포위 공격하는 전술로 내려오는 중공군으로 인해 최전선의 UN-한국군 부대의 방어선이 와해돼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올가미 전술’로 불렀다. 전면에서 일방적인 돌격이 아니라, UN군 부대를 발견하면 일정 부대는 교전하지 않고 우회, 포위한 후에 사방에서 돌격해왔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퇴각하는 한국군 병력을 쫓아서 진격해왔다. 퇴각 중인 한국군 병력 구원에 나선 영연방군 27여단에 배치된 패트리샤대대와 호주군 대대는 4월 23일 가평에 도착했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캐나다군과 호주군이 각각 긴급하게 양쪽의 고지에 방어진지를, 한국군과 미군이 철수하는 수 시간 사이에 만들었다. 이윽고 중공군은 5배가 넘는 병력으로 캐나다군과 호주군 공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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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가평 고지에 진지를 만들고 있는 패트리샤대대원. 사진=캐나다군 뉴스필름 캡처


특히 24일과 25일밤에 캐나다군의 동쪽과 서쪽 양측면을 담당한 B중대와 D중대는 야간 포위공격을 당했다. 캐나다군은 뉴질랜드군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밤낮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중공군을 섬멸해 서울로 가는 길을 지켰다.

캐나다군은 나팔을 울린 후, 예광탄을 일종의 신호로 삼아 대열을 지어 돌격해오는 중공군을 기다렸다. 원거리 교전을 하지 않고, 중공군이 참호 근처의 지정 좌표에 도달하면 포격을 가하고, 동시에 기관총∙곡사포 일제 사격으로 화망을 형성했다. 화망을 뚫고 전진해온 중공군에게는, 야간에 효력이 덜하고 부대원의 위치가 알려질 수 있는 개인 소총 사격보다는, 수류탄을 아래로 굴리도록 했다. 패트리샤 대대 B중대는 이런 방식으로 응전해 한 장소에서 51명의 중공군 사망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와해된 후, 한국전쟁은 중부전선에서 교착전 양상으로 전환하게 됐다. 그리고 7월 북한과 중공은 휴전을 위한 협상에 동의했다.

캐나다 필름보드,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군 활동 다큐멘터리

캐나다, 대한민국에 지원 확대

가평의 대승 이후, 캐나다 정부는 한국전 지원을 더욱 확대하기로 했다. 1951년 5월 25일에는 캐나다 제25 여단이 제1영연방 사단 소속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25여단은 병사 4,800명, 장교 235명 규모로 미국 워싱턴주 주도 올림피아 인근의 포트 루이스에서 미군과 함께 훈련을 받고 한국에 파병됐다.

25여단은 3개 보병대대와 2개 기갑 소대로 구성돼 패트리샤 대대를 대체하는 동시에 인원을 증원한 추가 파병이었다. 25 여단은 임진강 방어 임무에 투입됐다. 1953년 한국전 휴전 이후 1955년까지 한국을 지킨 부대다.

1952년 말에는 캐나다 정부는 공병대와 의무대를 파병해 한국의 재건을 지원하기도 했다.
교대 파병으로 캐나다군인 총 2만 6,000명이 파병됐고, 전사자는 516명으로, 이중 312명은 전투 중 전사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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