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캐나다군의 최대 수훈으로 꼽히는 가평전투를 묘사한 그림. Holding at Kapyong, Edward Fenwick ("Ted") Zuber 작

캐나다의 리멤브런스데이(Rememberance Day)는 매년 11월 11일 1차와 2차 세계대전, 한국전 참전용사와 캐나다를 위해 희생한 군인과 경찰을 기리는 날이다. 11월 11일은 원래 1차 대전이 종결된 날로 이날 오전 11시 2분간 추모의 묵념을 한다. 한인에게는 한국전쟁에서 희생한 캐나다인을 추모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의 역사적인 상황을 정리해봤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한국전에 캐나다 참전을 결정한 건 루이스 생로렝(Louis St. Laurent) 제12대 총리다. 자유당(LPC) 소속 생로렝 총리는 총 2만6,000명을 파병했다. 특히 한국 파병은 후일 총리가 되는 레스터 B. 피어슨(Lester B. Pearson) 당시 외무부장관의 역할이 크다. 향후 냉전을 예상한 피어슨은 “UN의 깃발 아래 집단 안보를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1954년 휴전 직후 한국을 방문해 캐나다 주둔군을 돌아보는 생 로랭 캐나다 총리. 사진=Library and Archives Canada

한국전 발발 5일 후, 1950년 6월 30일에 캐나다는 아사바스칸, 키유가, 수 3척의 구축함을 최우선 파병했는데, 초기에는 UN협상으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고 봤다. 미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고 예상해 해역 감시와 초계 업무가 일단 배정됐다. 그러나 전쟁이 심화하면서 1953년까지 캐나다는 총 8척의 구축함을 한국에 파병했고, 구축함은 총 13만발의 포격을 가한다. 주로 전쟁 물자를 나르는 해안 철도 파괴가 주 임무였다.

▲한국전 초기에 투입된 캐나다 군함들. 위로부터 아사바스칸, 키유가, 수.

1950년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군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북한군에 패배한 후, 캐나다에도 전황의 심각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군과 미군이 북한군 탱크의 진격을 잡지 못하는 거로 파악되자, 미국 지상군 추가 파병 및 캐나다 지상군 파견이 본격 거론됐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을 앞두고 캐나다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군대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 당시 캐나다군 저격수. 사진=Library and Archives Canada

캐나다 군당국은 2차대전 후 군 개편을 통해 사실상 지상군을 축소하는 작업 중이었다. 그러나 오산 전투 직후 다시 지원병을 받기 시작해, 1950년 8월 7일 캐나다군특수부대(CASF) 설립을 발표하고, 단 8일만인 15일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대 제2대대를 캘거리 인근 웨인라이트기지에서 새로 편성한다. 새로 편성된 부대는 미군함 프라이빗 조 P. 마티네즈호를 타고 11월 25일 부산에 상륙했다. 이후 8주간 산악 숙지 훈련을 거친 후, 1951년 2월에 전방에 참전했다. 즉 6개월만에 없던 부대를 만들어 전방에 투입했다.

▲ 1950년 12월 한국에 도착 후 산악 숙지 훈련 중인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대 제2대대원. 사진=Library and Archives Canada

캐나다 지상군 투입은 사실상 확전, 세계 대전 가능성 우려에도 불구하고 진행됐다. 당시 공영방송 CBC는 그러나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이 미국보다 적고, 또한 핵전략이 완전하지 않아 확전 가능성은 없다고 분석했는데, 이는 비교적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사회 발달의 최종 결과는 공산주의”라는 공산 독트린 때문에 공산 진영이 전쟁을 최선보다는 최후의 수단으로 삼을 거란 분석은 오판이었다. 중공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캐나다군 전방 배치와 약간 앞선 시점에 중공군이 쳐내려오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했다가, 다시 4월 퇴각했다. 이후 계속해서 춘계 대공세를 수차례 시도했다. 특히 중공군의 다섯 번째 서울행 공세로 가평전투가 벌어졌다. 캐나다군이 속한 영연방 27여단은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맞이해 경기도 가평 일대 고지를 지켜 서울을 사수했다. 캐나다군은 677고지를 지켜, 중공군에 밀려 내려오는 한국군 6사단의 와해를 막았고, 동시에 경춘 가도를 지켰다. 가평 전투는 캐나다군이 한국전에서 이룬 최대 수훈으로 꼽힌다.

1951년 여름 이후 한국 전쟁이 교착전 양상을 보이자, 캐나다군 파병 형태는 더욱 다양해졌다. 초기 투입한 보병대와 해군, 공군 수송부대 외에도 곡사포 부대와 항공전투부대를 추가 파병했고, 이어 1952년 말부터는 공병대, 의무대 등 전후 복구를 위한 부대도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전에서 캐나다군인 516명이 전사하고, 1,200명이 부상 당했다. 이는 캐나다 역사상 1∙2차 대전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피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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