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에 결사 항전하는 역사적 배경에는 1932년부터 33년 사이 홀로도모르(Holodomor)가 있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아사, 즉 굶어 죽는다는 뜻이다. Holod는 굶주림, Mors는 죽음이다.

1917년부터 1921년 사이 우크라이나는 짧은 기간 독립국가를 이뤘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출발한 소련군이 쳐들어와 정복하고, 우크라이나를 소련에 강제 편입했다. 1920년대 소련은 지지를 얻기 위해 자율화 정치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통해 어느 정도 허용했다.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홀로도모르 kruty
공산군의 서진을 막기 위해 1917년 신생 독립국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자원 학도병을 동원해 크루티에서 일전을 치뤘다. 당시 상황을 영화로 담은 크루티 1918의 한 장면.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해체 작업

1920년대 말에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자치권 축소를 결정하고, 우크라이나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지식인과 교회 지도자를 협박하거나, 투옥하고, 때로는 처형했다. 일단 공산당 외의 저항할만한 사람을 모두 제거했다.

이어 농업 중심의 우크라이나 경제력을 말살하는 방법으로, 집단 농장 체재를 우크라이나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비옥한 농토에서 대대로 자급자족해온 우크라이나인 농민은 반발했다. 스탈린은 이들을 쿨라크(부농∙Kulak)라며 “착취자이자 기생충”으로 낙인찍고, 이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추방했다. 농부가 추방당하면서 1931년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량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생산량이 감소했음에도 1932년에는 우크라이나에 마을 단위로 무자비하게 곡물 생산 할당량을 요구했다. 곡물은 외국에 판매해 만성 부족 상황인 소련의 공업장비를 들여올 작정이었다.

징발대 종자까지 수탈… 다섯 줄기의 곡물법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거로 보이자, 공산당은 징발대를 보내 농부들의 곳간을 뒤졌고, 파종을 위해 남겨둔 종자까지 수탈해갔다. 숨겨둔 곡물이 발견된 우크라이나 농민의 1/3이 감시 대상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때 악명 높은 법이 1932년 8월 7일, 수확철을 앞두고 발효한 “다섯 줄기의 곡물법(the Law of Five Stalks of Grain)”으로, 만약 밀 다섯 줄기에 나오는 한 줌 정도의 곡식을 빼돌리면 징역 10년 또는 사형에 처했다. 우크라이나는 곡물 생산량의 40~50%, 약 800만 톤을 소련에 수탈당했다.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홀로도모르 holodomor tor
토론토 시내에 있는 홀로도모르 추모 소녀상. 손에 든 밀 줄기는 우크라이나의 상징이지 수탈 당한 곡물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진=앨버타대 우크라이나학 연구소(HREC)

여행증 제도로 외부로 여행 금지… 군대로 국경 막아

수탈의 결과는 비참했다. 1932년 겨울에 식량이 떨어진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타지로 식량을 구하려 떠나기 시작하자, 소련은 여행증 제도를 도입해 발을 묶었다. 기근 발생 소식이 타지로 퍼지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여행증에 이어 1933년 1월에는 비밀 명령으로 우크라이나 대부분 국경 지역을 군대로 봉쇄해 탈출을 막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해체해 지역 정치세력 일소

또한 1933년 1월 우크라이나 지역 공산당을 해체하고 관계자들을 숙청했다. 기근으로 끓어오른 우크라이나 민심 환기를 위해, 무능한 우크라이나 지역 공산당 해체한다가 표면적인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우크라이나인 정치 세력을 일소하는 역할을 했다.

이를 진두 지위한 인물은 스탈린의 심복인 파벨 포스티세프로, 1933년 한 해 동안 거의 10만 명의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을 숙청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포스티세프는 1939년 스탈린의 대숙청에 의해 제거당한다.

1933년 아사자 발생… 하루 최대 2만8,000명 사망

상황은 더욱 악화해, 1933년 봄에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6월이 정점으로 하루 2만8,000명이 사망해 마을 전체가 사라지거나, 집단 농장이 와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인이 죽은 자리에 1933년 8월 15일부터, 소비에트 재정착 위원회는 러시아와 벨로루시 출신 농민 11만7,000명을 재정착 시켰다. 이러한 재정착민 후손과 우크라이나 동부를 2차 대전 이후 산업화하면서 유입된 러시아인과 후손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친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의 시조가 된다.

홀로도모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여러 연구가 있지만, 이중 캐나다 학계에 통용되는 숫자는 390만명으로, 우크라이나 당시 인구의 13%에 해당한다.

홀로도모르를 알리는데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의 역할은 적지않다. 이들은 캐나다 정부에 요청해 홀로도모르 추모일(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재정했고, 연구를 통해 당시 역사를 증언하는 논문을 다수 내놓고 있다. 또한 북미 지역내 증언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교육용 자료로 배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상당수가 홀로도모르 직전 이민 왔거나, 스탈린의 탄압을 피해 나온 사람들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이 기사의 자료원: 캐나다 홀로도모르 재단 , 알버타대: 우크라이나 기근과 인구 연구 , Holodomor National Awareness Tour, 캐나다 연방정부, 홀로모도르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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