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상식백과 35

[상식백과(35)] 캐나다의 실패한 혁명, 반란으로 기록됐다

파피노, 책임정부 요구

인간은 자기가 정당하다고 믿는 삶의 길을 타인에게도 적용하고자 한다. 정치는 그런 삶의 길을 거래하는 자리다. 정치가 거래를 금지할 때, 역사에는 판을 엎으려는 사람과 막으려는 사람이 나타난다. 불어권 로워 캐나다에서 루이-조셉 파피노(Louis-Joseph Papineau)가 이끄는 하원 내 애국당(Parti Patriote)은 영국이 임명하는 총독과 총독 임명제 상원의원 보다 하원을 더 우위에 두는 안등 92개조 개혁안을 1834년 요구했다. 당시 선출직 하원은 예산집행권에 제한이 있었다. 애국당 요구는 ‘책임 정부(Responsible Government)’로 요약됐다. 책임 정부란 “국민 투표에 책임지는 정부”이자 “선출된 의회를 통해 구성한 내각”을 뜻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당대 캐나다 내각은 “왕실(영국 의회)의 대리인 총독에 의해 임명된 내각”이었기 때문이다.

루이-조셉 파피노
루이-조셉 파피노

 
그러나 영국은 수용을 거부했다. 영국은 애국당 요구를 독립 활동으로 봤기 때문이다. 결국 1837년 11월 몬트리올 외곽 생듀스타스에서 주로 불어계로 구성된 애국당 혁명군과 영국군-영어계 민병대 사이에 교전이 발생한다. 애국당군을 격파한 영국군 -민병대는 인근 불어계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는 추태를 벌였다. 이 사이 파피노는 미국으로 피신한다. 파피노는 1838년 미국인 민병대를 이끌고 북상해 2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제압된다. 파피노는 미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피신했다.
파피노 연설
애국당 대표 파피노가 혁명 직전 연설하는 모습. 애국당기인 녹백적기에 녹색은 아일랜드계, 백색은 프랑스계, 적은 영국령을 각각 을 상징한다. 애국당이란 이름은 당시 영국 왕실-식민지가 아닌 자체 국가에 충성한다는 명칭이다.

 

맥켄지, 족벌주의 비판

권력자는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효과적으로 권력을 독점하려면, 지역이나 신분 동질성을 가진 사람 사이에 권력을 나눠야 한다. 이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배제돼 불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William Lyon Mackenzie)는 업퍼 캐나다 신문발행인으로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의 족벌주의(family compact)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족벌주의 핵심에 있던 사람은 로열리스트 후손으로 정계와 재계 혼인관계로 연결된 당대 사회 지도층이었다. 이들은 영국과 줄대기를 통해, 식민지 캐나다 정치 개혁을 막고 권력을 독점하는 폐단의 핵심이었다.
맥켄지는 업퍼 캐나다 은행, 영국 성공회 교회, 업퍼 캐나다 변호사 협회, 캐나다 컴패니(식민지 개척회사) 네 곳을 족벌주의 중심단체로 비판했다. 앞서 그는 토론토 시장(1834년)으로 선출됐지만, 이들 족벌주의 세력에 의해 제대로된 정치를 하지 못했다고 선언했다.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

 
맥켄지에 배제된 사람들이 호응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영국계 이민자에 대해, 미국계 이민자보다 우선적으로 서부지역 ‘개척지’를 나눠줬다. 맥켄지는 1837년 12월 주로 미국계로 구성된 무장 행렬을 이끌고, 토론토에서 정부 전복에 나섰다. 그러나 막상 반혁명 민병대와 교전이 이뤄지자 제대로된 저항을 못하고 뿔뿔히 흩어진다. 결국 맥켄지 역시 미국 뉴욕으로 피신한다. 1837년 반란 실패로 캐나다 국내 개혁파(Reformers) 세력이 대부분 휩쓸려 나갔다.
몽고메리 타븐 전투
몽고메리 타븐 전투… 1837년 12월 7일 현재 토론토시내에서 맥켄지 혁명군을 향해 진압군이 발포하고 있다. 대포를 쏜지 20여분 안에 혁명군이 도주하며 상황은 종결됐다. 몽고메리 타븐은 진압군에 약탈 당했다.

온건파에서 과격파로 전환

캐나다가 개혁에 들끓은 건, 1830년 왕을 몰아낸 프랑스 혁명과 많은 연관성이 있다. 프랑스 혁명을 본 캐나다 지식인들은 크게 기득권과 개혁파로 나뉘었다. 기득권은 점진적 개선을 내세웠지만, 정작 자신들의 지배를 보장하는 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개혁파는 규제 해소를 요구하는 자유주의를 들고 나왔다. 종교와 정치 분리 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시 종교단체, 로워캐나다에서는 가톨릭 교회 중심인 빈민 구제 활동을, 국가가 대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애국당에서 나왔다. 초기 캐나다 개혁파는 상당수 온건파였다. 공화국인 미국이 옆에 있고, 영국 내에도 개혁파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온건한 요구를 영국이 수용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830년대 말까지도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쌓인 불만은 프랑스 혁명 같은 인민 혁명이 필요하다는 과격파가 등장한 배경이 됐다. 이들 무장 혁명은 호응 부족으로 결국 실패했다. 혁명이 아닌 1830년대 반란(Rebellion of 1830s)으로 역사책에 기록됐다. 이 실패에 실망한 개혁파 일부는 민주주의를 하려면, ‘공화정’ 미국에 캐나다가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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