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백과(26)] 15분 전투가 캐나다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브라함 평원 전투는 7년 전쟁의 일부

프랑스가 캐나다를 상실한 건, 북미에서 전쟁 뿐만 아니라 유럽 주요 국가가 참전한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시초는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가 신흥 강국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넘어간 슐레지엔 탈환 목적으로 벌인 전쟁이다.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이었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이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캐나다와 인도에서 각각 싸웠고, 결과는 영국의 승리였다. 캐나다에서 벌어진 전란을 따로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라고 한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프랑스와 원주민 연합군을 영국군이 격퇴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단 영국군도 프랑스와 원수였던 이로쿼이와 협력하기는 했다.

대서양에서 내륙으로 영국세력 확장하며 분쟁

처음 분쟁은 오하이오에서 일어났다. 당시까지, 영국령은 주로 대서양연안 남부였다. 이 지역은 근 300년에 가까운 개발 끝에 인구 100만명이 넘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확장을 원했고, 그래서 내륙의 원주민령인 오하이오 계곡에 1750년대 영국계가 ‘개척’을 시작했다. 오하이오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 당시 언론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었다. 원주민의 분노에 대해 프랑스는 1755년 군대를 보내 영국계 정착민을 살해하고 몰아낸다. 프랭클린은 “프랑스와 함께 북미에서 살 수 없다”는 사설을 쓰면서, “태어나지 않은 수천의 우리 아이를 ‘캐나다(당시 북미 프랑스령 통칭)’가 죽였다”라고 주장했다.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보복으로 1755년 아카디아에 프랑스계 아카디아인을 추방했다.

1750 북미 세력도
1750년 북미지도. 자료원=Wikimedia Common

초반 프랑스 유리, 후반 영국 유리

1756년 유럽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은 북미 전쟁에 불을 질렀다. 초반 프랑스는 원주민과 추방당한 아카디아인을 규합했다. 특히 캐나다 태생 총독,  보드로이 후작(Marquis de Vaudreuil)은 둘을 연합해 게릴라전으로 영국을 괴롭혔다. 그러나 프랑스는 귀족 몽캄 후작을 1756년 캐나다로 보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보드로이와 몽캄 사이에 갈등을 불러왔다. 몽캄은 보드로이식 또는 캐나다식 게릴라전이 아닌 대규모 전투를 벌여, 레이크온타리오 서부의 포트 오스웨고(1756년)와 포트 윌리엄 핸리(1757년) 두 곳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린다. 유럽에서도 강력한 프랑스 육군은 약한 영국 육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보드로이 후작, 캐나다 총독
보드로이 후작, 캐나다 총독

전략이 전술을 뒤집었다

여기에 대해 ‘대(大)피트’로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피트 백작은, 유럽 전선이 아닌 식민지 전선 우선 전략을 수립한다. 유럽에서 이기지 못하면, 식민지에서 이기자는 이 전략으로 북미에 해군을 파병한다. 반면에 ‘약한’ 영국군 육군 격파에 고무된  프랑스는 영국 상륙작전을 꿈꿨다. 강력한 영국 해군을 뛰어넘기 위해 자국의 해군력 비축 전략을 세운다. 즉 전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이 결과 1758년 7월 프랑스의 대서양 관문격인 루이스버그 함락으로 전쟁의 방향은 바뀐다. 루이스버그 함락 후, 몽캄은 5대호 북쪽에 요새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힘쓴다. 그러나 요새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영국이 자국 해군 4분의 1에 해당하는 해군력과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조직한 대규모 육군을 세인트로렌스 강에 투입해, 대대적 포격으로 요새를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이 1759년 9월 퀘벡 인근에 상륙해 도시를 향해 진군한다.

전장 지형을 파악하지 못해 전투를 패배로 이끌었다

울프 영국군을 제압하기 위해 몽캄이 이끄는 군대는, 수시간을 행군해 아브라함 평원에 나타난다. 아브라함 평원 전투 당시 몽캄은 해당 부대가 침략 주력군인지 여부를 파악하지 못했다. 영국군이 포격을 시작하자, 몽캄은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대응 포격과 보병 진격을 결정한다. 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프랑스군 진형은, 먼저 보병 발포를 했지만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결국 열을 형성해서 화력을 집중한 영국군 1차 사격에 진영이 완전히 흐트러진다. 이후 스코틀랜드 돌격병에 밀려, 전투는 15분 만에 끝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총탄에 맞은 울프는 승전 소식을 들은 지 수분 만에 32세에 사망했다. 몽캄은 퀘벡으로 퇴각 지휘 중, 총에 맞아 그 다음 날 47세로 사망했다. 프랑스군은 퀘벡 시티를 포기하고 퇴각한다. 영국군은 퀘벡 시티를 점령한다.  영국은 승전소식과 함께 울프 전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 JoyVancouver ?  | 권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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